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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의 보편적 샤머니즘 이해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보편적인 샤머니즘에 대한 비평적 이해” 



1. 엘리아데의 연구성과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샤머니즘》(Shamanism)은 1974년에 영역본이 나왔다. 그런데 이 영역본은 1945년의 출판 된 프랑스판 《샤머니즘》 (Le Chamanisme et techniques archaïques de l’extase)을 번역한 것이었다. 이 말은 샤머니즘에 대한 엘리아데의 연구는 1940년대의 이전 자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아데의 샤머니즘 연구는 아직도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있고, 그 학술적 가치를 논할 정도로 시대를 앞서는 선도적 연구였다. 게다가 단행본 820편, 논문 자료 970여 편을 참조하여 수행한 방대한 자료들을 참고 했으며, 또한 630페이지에 달하는 한마디로 거대한 작업이었다. 그의 이런 노고는 《샤머니즘》을 우리 시대의 샤머니즘에 관한한 최고의 고전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엽적인 문제로 볼 수 있으나, 몇몇 자료는 직접 조사가 아니라 자료에만 의존하다가 보니까 부실한 자료를 바탕으로 단정을 내린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 무속에 대해 ‘남방적인 요소’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을 하는데, 무엇이 구체적으로 남방적인 요소인지 그리고 그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 전혀 언급이 없었다. 또한 ‘여무가 우세한 것’을 두고 ‘샤머니즘의 쇠퇴의 징후’이거나 ‘남방의 영향’이라는 평가

는 너무 자신의 이론에 매달려 지역적 특성이나 역사적 정황을 간과한 섣부른 결론이었다라고 비판할 여지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아데의  《샤머니즘》이 지금도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그 이전의 선행 연구들을 뛰어 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으며 학술적인 논구가 제대로 된 최초의 연구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것은 이전의 연구들이 선교사들의 자료 수집, 나열과 민족지학 (ethnography) 의 문화기술이거나 심리학, 사회학, 민속학자들이 소위 진화론에 입각한 연구가 대다수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반면에 엘리아데는 이전의 연구성과들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샤머니즘 이론을 정립하고자 했다. 엘리아데는, 1) 샤머니즘이 기성 종교적인 성격을 부정하고, 2) 샤머니즘의 본질을 샤먼(shaman)의 공연성 또는 굿(sēance)와 결부된 영적인 기술에 국한함으로써, 3) 샤머니즘이 시베리아의 고유한 문화전통이 아닌 인간의 영적인 특성의 원형으로 제시했다.

 즉 종교학자로서 샤머니즘을 단순한 지역적인 역사자료라는 편협한 시각을 통해서만 보면 안되면 오히려 깊은 의미를 해석하고 해독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샤머니즘을 시베리아의 지역적인 문화특성이 아니라 범지구적이고 보편적인 종교현상으로 해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제시한 해석학적 틀로 인해 가능했다. 즉 샤머니즘을 종교적 인간(homo religious)이라는 그의 해석학적 전제를 가지고 세계인류가 경험하는 원형적인 정신문화로 볼 것을 주문했던 것이다. 이러한 엘리아데의 연구 업적은 샤머니즘을 흔히 지칭하던 이교주의(paganism)을 대체하는 긍정적인 용어로 환영을 받았다.

 

2. 엘리아데의 샤머니즘

엘리아데의 샤머니즘을 본격적으로 평가를 위해 그에게 나타나는 샤머니즘의 쟁점에 대해서 몇 가지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첫째, 샤먼의 정의문제이다. 엘리아데는 “탈혼망아의 체험을 통해서 교도를 치유하고, 사자를 명계로 인도하고 그들과 천상계 및 지하계에 있는 크고 작은 신들 사이에 중보자(mediator)로 봉사하는 사람이 바로 샤먼이다”라고 언급한다. 즉 샤먼은 ‘엑스터의 기술’(technique of ecstasy)을 통해 천계상승이나 지하계 하강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엑스터시 전문가인 셈이다. 이 기술을 통해 악령이나 질병과 싸울 수 있는 특수화된 특기자이기도 하다. 엘리아데는 그러면서 샤먼을 엑스터시 경험(ecstasy experience)를 통해 고귀한 종교적 체험을 얻는 접신의 전문가이기도 하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면모는 여타의 종교 전문가와 분명하게 구분된다. 또한 엘리아데에 의하면 샤먼은 영신(spirit)과의 관계에서도 정의된다고 보았다. 즉 샤먼은 결코 ‘영신들에 의해서 빙의(possessed)되지 않으며’, 영신들의 ‘도구(instrument)로 전락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물론 빙의되는 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특별한 설명이 필요한 매우 드문 사례라고 말한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그렇다면 탈혼이 아닌 빙의가 된 경우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엘리아데의 평가와는 다르게 많은 나라에서 빙의된 샤먼의 모습이 등장한다는 점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둘째, 시간성의 문제이다. 엘리아데가 샤먼을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엘리아데는 샤머니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고대의 접신술(the archaic techniques of ecstasy)-신비주의인 동시에 주술이자 넓은 의미의 종교”

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고대는 영어의 ‘ancient’라는 시간적 의미의 단어가 아니라 ‘archaic’이라는 ‘시간상의 개념’이 아니라 ‘원초적’ 또는 ‘원형적인’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를 사용했다

는 사실이다. 엘리아데가 시베리아의 공간성을 뛰어 넘으려고 했던 것만큼 주목했던 것이 바로 “시간성”의 문제였다. 그는 샤머니즘을 현대에서도 그 영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살아 있는 의미를 주목하려고 했던 것이다. 즉 과거의 한 때에 존재했던 종교현상이 아니라 지금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존하는 영성적인 의미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 담지하고 있는 종교현상이 바로 샤머니즘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엘리아데가 샤먼을 이상적인 존재, 지고하고 순수한 종교적인 전문가로 본 것만은 아니다. 저널리스트인 클라우드 앙리 로케(Claude-Henri Rocquet)의 대화집인 《미로의 시련》(L’épreuve du labyrinthe)에서 엘리아데는 “샤먼은 공동체의 영적인 안내가자 되기 위해서, 공동체를 교화하고 안심시키기 위해서 안보이는 것을 표현하기도 해야 하고, 속임수를 써서러도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고 언급한다.

 그런 면에서 엘리아데가 샤먼을 순수하고 원초적인 종교 전문가로만 표현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럼에도 샤머니즘 속에서 원형적인 것에 대한 기대가 묻어 있다. 그는 분명히 샤머니즘을 통해 비역사적이고 시간과 관련이 없는 성스러움의 의미와 구조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아데는 샤머니즘을 ‘고대의 접신술’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보편성의 문제이다. 엘리아데는 정말 ‘백과사전(encyclopedia)식’으로 다양한 샤머니즘의 경우들을 예를 들고 있다. 그가 예를 들고 있는 샤머니즘은 우리에게 샤머니즘의 원형을 제시하는 시베리아에서 북미, 남미, 동남 아시아 그리고 유럽, 고대 그리스까지 그 역사적 층위와 지역적 범위가 깊고 다양하다. 즉 엘리아데는 샤머니즘이 범세계적인 보편적인 문화현상, 영성(spirituality)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정말 백과사전처럼 다양한 사례들을 들고 있다. 문제는 구조적인 유사성

에 기대어 외연의 끊없는 확대는 가지고 왔지만, 정작 문제는 구조적으로 확대된 큰 틀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샤머니즘의 개념적인 혼란을 야기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비판들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즉 백과사전식 나열이라는 주장과 너무 개념 설정이 모호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3. 엘리아데의 샤머니즘에 대한 개인적인 비평

우리는 간단히 세 가지의 주제 안에서 엘리아데의 샤머니즘을 정리해 보았고, 문제점을 생각해보았다. 세 가지 주제의 문제란 샤먼의 정의, 시간성 그리고 보편성의 문제들이다. 먼저, 샤먼의 정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빙의(possession)와 탈혼(trance)의 양자이다. 왜냐하면 엘리아데는 빙의의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빙의의 경우는 한국 무속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샤먼인 무당에게 몸주신인 귀신뿐만 아니라 조상신들이 들어와서 빙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라 너무나 흔하다는 것이다. 엘리아데 역시 그의 책에서 만주 퉁구스족의 이야기를 통해서 ‘영신이 몸에 들어와 샤먼이 바닥에 쓰러지고 공수를 하는 것’

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본인은 드문 경우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둘째, 시간성의 문제에 관한 것을 말하자면, 이렇다. 엘리아데는 ‘창조적인 해석학’을 통해 신화-종교 자료에 대한 초역사적인 의미를 언제나 읽어 내려고 한다. 그리고 그 초역사적인 의미란 비역사적이고, 시간과 관련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종교는 시간성 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지극히 역사적인 실체이다. 다시 말해 역사와 사회적 환경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종교현상이라는 사실이다. 엘리아데 본인도 “모든 종교가 그 기나긴 내적 변화의 과정을 겪은 뒤에 결국 자율적인 구조를 전개”라면서 “종교 전통의 모든 요소-가장 본질적인 요소-의 개조, 갱신, 회복 그리고 통합이 있을 뿐이다”

고 언급한다. 물론 엘리아데의 방점은 “가장 본질적인 요소”일 것이다. 과연 갱신과 회복의 끊임없는 반복일까? 아니면 전혀 새로운 종교적인 현현은 없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보편성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논의를 마칠까 한다. 엘리아데도 이전 연구가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시베리아를 염두해두고 있다. 즉 시베리아가 고대적 종교성의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엘리아데가 샤머니즘을 시베리아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종교현상으로 평가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해석은 언제는 보편적인 구조를 통해서 해독해야 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엘리아데에게 있어서 종교현상은 지역적이며, 역사적 환경에 환원된 존재가 아니라 종교적 인간(homo religious)이 경험하게 되는 보편적인 종교 경험이다. 즉 샤머니즘 역시 범세계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데, 인간은 태고의 종교적 원초성을 각자의 환경과 역사적 경험이 다르긴 하지만 여전히 기억되고 지켜지는 보편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참 고  문 헌

Douglas Allen, Myth and Religion in Mircea Eliade, 유요한 역, 《엘리아데의 신화와 종교》, 서울;이학사, 

           2008.

Mircea Eliade, Shamanism, 이윤기 역, 《샤머니즘》, 서울;까치, 1996.

                      , L’épreuve du labyrinthe, 김종서 역, 《미로의 시련》 서울;북코리아. 2011 

문상희, <엘리아데의 샤머니즘 이해> , 〈연세교육과학〉 Vol.14. 1979.

양민종, <시베리아 샤머니즘인가 아니면 엘리아데의 샤머니즘인가> , 〈한국시베리아연구〉 Vol.11. 2007.

          , <‘엘리아데주의’(엘리아데이즘) 검토를 통한 샤머니즘 연구사의 방향성 이해> , 〈동유럽 발칸학〉 Vol.8.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