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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 대화



8장 종교적 대화(Religious Dialogue)  



  1. 오리엔탈리즘의 도전(the Challenge of Orientalism)

20세기 서양철학에서는 아직 동양이 주변적인 존재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종교와 신학의 영역에서만큼은 매우 다른 대접을 받았다. 이에 대해, 신학자 제프리 패린더(Geoffrey Parrinder)는 빅토리아(Victorian) 시대의 신앙 위기에서 불교는 종교개혁(Reformation)에 버금가는 강한 영향(impact)을 주었으며, 이 사건은 “근대의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 중에 하나”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빅토리아 시대 이후, 밀어 닥친 동양(the East)의 지적논쟁과 사회적인 영향력은  20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서양에게 있어서 동양은 위협인 동시에 구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회(the Jesuit)의 윌리엄 존스턴(William Johnston)의 경우, “우리는 지금 새로운 종교적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기독교와 위대한 동양의 종교들과의 만남이 될 것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의 저자(J. J. Clarke)는 동서양의 종교적 전통들 사이에 발생한 역사적인 대화를 살펴보면서 이 ‘획기적인 만남’(epochal meeting)을 고찰해 나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의 출간이나 신지학협회(the Theosophical Society)의 출현으로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학문과 종교에 대한 존중에 불과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동양종교를 공개적으로 채택하거나 고백한 사람들은 소수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서 서양의 정신적인 위기는 동양의 오솔길이 제시하는 정신적인 삶의 갱신과 심화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 즉 C. G. 융(C. G. Jung)의 지적처럼, “낡은 종교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인 에너지가 분출된 것”이었다.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의 물결은 미국 종교사에서 유래가 없는 것”으로 그만큼 동양에 대한 관심의 폭과 깊이가 다른 것으로 평가했다. 특히 1960, 70년대에 이르러는 동양종교는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예를 들어, 많은 젊은이들이 ‘크리슈나 의식을 위한 국제협회’(the International for Krishna Consciousness), 마하리쉬(the Maharishi), 바그완 라즈니쉬(Bagwan Rajneesh),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의 종교운동이 폭넓게 퍼졌으며, 이런 와중에 스즈키(D. T. Suzuki)와 앨런 와츠(Allen Watts) 등이 정신적인 자양분을 서구인들에게 제공하였다. 

이렇듯, 새로운 동양종교의 유행은 그동안 독점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던 기독교에게는 가히 심각하고 중대한 도전(challenge)이라고 받아 들일만 했다. 그것으로 인하여, 기독교 내부에서는 자신들의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이러한 상황을 “세계종교들의 극적인 조우”(the dramatic encounter of world religions)라고 표현했다. 이제 좋던 싫던 서구 기독교와 사회는 동양종교라는 강력한 라이벌을 조우하게 된 것이다. 패린더가 언급했던 것처럼 ‘유대교와 기독교는 자신들만이 최고의 진리와 철학을 소유한 우월한 존재라는 사고에 익숙해 있었는데’,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날카로운 도전을 접하게 된 것이다.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가 지적했던 것처럼 “다른 위대한 종교와 대화하지 않고는 기독교 조직신학을 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서구 사회에서의 동양종교에 증폭된 관심은 새로운 사상적 물꼬를 트게 하기 계기가 되었다. 


  1. 비교연구와 보편주의의 외양(Comparative Studies and the Universalist Outlook)

이러한 심각한 도전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일부는 위협으로 받아 들였는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평가와 쇄신의 기회라고 반가워 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의 경우는 정통신학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교의를 강화하는 쪽으로, 하비 콕스는 토론과 상호이해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폴 틸리히는 동서양의 조우가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순환하는 리듬으로 스스로를 재평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유연적인 입장을 각각 취했다. 종교철학자인 니니안 스마트(Ninian Smart)는 종교적 대화를 강력하게 옹호하면서, ‘상호적 다원주의’(interactive pluralism)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종교적 충성심을 불가피하게 양보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동양의 침입을 자신들을 위협하는 사악한 것으로만 간주하지 말고, 창조적인 긴장 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창조적인 것으로 활용할 것을 주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다원주의적 외양의 징후는 비교종교학(comparative religion)의 성장에서도 잘 나타났다.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는 실제적인 비교종교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사용한 단어인 “종교의 과학”(the Science of Religion)이라는 개념에서 잘 드러나듯이 새로운 학문인 종교학에서는 종교들에 대해서 진정으로 과학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즉 당파성이 없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서 중립성을 확보하게 된 비교연구가 비교종교학을 가능하게끔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전망처럼 비교종교학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성장과 확산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는 정식교수로 리즈 데이비스(T. W. Rhys Davids)가 1904년에 맨체스터대학(Manchester University)에서 임명되었졌다. 뿐만 아니라 종교학이 더 많은 학술기관과 대학에서 교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주지 하다시피, 비교종교학의 주제와 쟁점은 막스 뮐러에 의해서 기틀이 닦여졌는데, 그것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주제로 손꼽히는 것은 바로 ‘보편주의’(universalism)였다. 이 사상의 기저에는 “인간의 지혜 가장 깊은 곳에는 모든 인류가 포용하는 전망이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즉 철학적, 종교적 보편주의는 사람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계속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동시에 지구상의 사람들이 여러 측면에서 가깝게 될 때에 인류를 통합하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서구 지식인들 가운데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신학자 외의 인물 중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기독교로부터 걸어 나와 불교와 베단타 철학을 탐구하며 세계의 신비적 전통을 연구하는 등 동양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헉슬리는 수많은 저작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혀 왔는데, 인도의 종교 사상이 서구의 근대적 질병(공격성, 과도한 합리주의, 도덕적인 혼란 등)을 치유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신비주의에 근거해서 세계의 다양한 종교적 전통의 기저에는 진리의 핵심이 있으며, 이 핵심이 베단타 철학(Vedānta philosophy)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종교적 신념과 종파를 초월하는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지혜(perennial wisdom)의 탐구는 많은 경우 소위 ‘비의적 전통’(esoteric tradition)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비의적인 전통은 제도권 종교적 전통을 넘어서거나 그 물밑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어져 왔다. 이러한 ‘숨겨진’(hidden) 전통들은 고대 또는 동양의 종교 전통에서 존재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결과 동양 종교 전통에 영향을 받은 밀교주의(esotericism)가 19, 20세기에 유행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언급되어야 할 두 사람의 사상가가 있는데, 그들이 바로 르네 게농(René Guénon)과 프리초프 슈온(Fritjof Schuon)이다. 이들은 특히 불교와 힌두교에 의지하여 전 지구적인 종교의 모양을 설명하고자 했다.

  특히 게농이 경우, 막스 뮐러의 실증주의적 동양 해석을 거부하고, 헉슬리의 서구화된 베단타를 비판했으며, 심지어 신지학회의 주장을 근거없는 이미지 메이킹만으로 만들어 낸 ‘왜곡’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고대에는 인류의 공통적 유산이었으나 지금은 힌두교로 대표되는 베단타의 가르침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농의 추종자였던 슈온 역시 신비적인 전통에서 보존되어 온 영구적인 영성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1. 신비주의와 보편주의(Mysticism and Universalism)

보편주의, 밀교주의 그리고 신비주의는 자주 결합을 한다. 신비주의 경우 동서양 종교의 표면적인 차이점을 결합하고자 했던 서구 사상가들에게서 매우 매력적인 면이 있었다. 스테이스(W. T. Stace)는 신비주의가 모든 종교의 핵심이며 동양의 종교와 기독교를 가장 밀접하게 결합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의 경우, 종교들에게서 되풀이 되는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러므로 신비적 언설에는 영원한 일치성이 있다”고 여겼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신비스런 감정’(the sense of the numinous)이 모든 종교적 신념의 보편적인 기초라고 보았다. 

특히 신비주의를 통해 동서양의 정신을 비교한 사람으로 마틴 부버(Martin Buber)와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을 주목할만 하다. 인도의 시인이었던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친구였던 부버는 신비주의의 비교연구를 지지하면서 동서양의 종교 간 대화를 주장했다. 그의 핵심 사상인 ‘나와 너’(I-thou)와 ‘나와 그것’(I-it)의 관계에서 타자를 ‘존재 그대로 두는’(let be)의 사상을 도교의 무위사상(Taoist idea of wu-wei) 에서 차용해왔다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샤르댕은 중국에서 여러 해를 살았었으며, 이 경험이 동양에 관심을 갖게 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세계종교들을 거울 삼아 자신의 종교를 재고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했다. 나아가 중국이 “서양에 젊은 가져다 주는 사상과 신비주의의 보고”라고 여겼기에 중국과의 정신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신학자 우르술라 킹(Ursula King)은 그에게서 보편주의적 안목을 발견했는데, 동양을 경험하지 않고는 “궁극적으로 동양과 서양을 함께 초월할 하나의 지구를 꿈꿀 수 없으며 통합성과 보편성 그리고 용감한 탐구정신을......발전시킬 수 없다”고 한 언설이 이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물론 보편주의전 전망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카츠(S. T. Katz)는 신비주의는 각기 다른 사회적, 종교적 환경의 산물이며, 서로 다른 전통으로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동양에 신비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는 관념은 서양의 합리주의 대척점에 동양의 것을 두려는 서양의 패권적인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여겼다. 다른 이들 가운데에는 보편성의 강조가 문화적 다양성이나 정체성을 약화 시킨다는 견해도 있다.(물론 이들 외에도 제너(R. C. Zaehner)는 ‘일관성의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라면서 보편주의를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이렇듯 보편주의는 종교가 문화와 역사적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상대적인 요소들을 간과할 수 있는 서구 문화제국주의의 ‘전체화’(totalising)의 담론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은 깊이 염두해 두어야 할 것 같다.

  1. 신앙 간의 대화(The Inter-Faith Dialogue)

그렇다고 해서, 보편주의적인 기획의 쇠퇴가 비교종교 연구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편주의적 기획의 유산으로 인해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이 가능해졌다. 그 새로운 단계란 바로 ‘대화’(dialogue) 였다. 사실 기독교 종파들 간의 낮은 단계의 대화에서 동양종교와의 적극적인 대화로 진척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화의 물꼬는 1893년의 ‘세계종교회의’(the World’s Parliament of Religions)였다.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눈 최초의 시도였다. 제1차,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과 미국에서 다양하게 종교 간 대화가 진행되어질 정도로 대화는 급성장을 거듭했다. 1921년은 루돌프 오토에 의해서 ‘종교인 연맹’(the Inter-Religious League)이, 그리고 ‘세계신앙단체 국제회의’(the International Congress the World Fellowship)와 ‘세계신앙회의’(the World Congress of Faiths) 등등 많은 단체들이 설립되어졌다. 

1933년과 1969년 사이까지 지속된 종교세미나인 ‘에라노스’(Eranos)에서는 종교다원성을 인정하고, 대화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 모임의 좌장격인 C. G. 융은 주요 의제와 논조를 설정하는데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참석자들 중에는 물리학자, 인류학자뿐만 아니라 신학자인 마틴 부버, 폴 틸리히, 오리엔탈리스트인 캐롤라인 리즈 데이비즈(Caroline Rhys Davids), 스즈키, 종교학자인 엘리아데(Mircea Eliade)와 같이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참석했다. 특히 엘리아데

는 동서양 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만약 서구문화가 다른 문화들을 경멸하거나 그것들과의 대화를 소홀히 한다면 편협한 지방주의(provincialism)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해석학은 타자들(the others)의 문화적 가치와의 조우 및 대면이라는 지상과제에 대한 서구인의 대응 중 유일하게 지적인 대응이다.” 틸리히는 ‘개종’(conversion)이 아닌 ‘대화’를 말하면서 만약 기독교가 이것을 받아 들인다면 거대한 진전의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타자들의 문화적 가치와 대면해야 할 필요성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긴급한 사안이 되었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종교다원성에 의식이 증가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는 더 이상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또한 ‘기독교의 계시는 유일무이하고 배타적인가’ 하는 신학적 논쟁들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1970년에 개신교의 WCC(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에서는 ‘신앙과 이념으로 사는 인류의 대화’(Men of Living Faiths and Ideologies) 라는 하부기구를 설치하여 다른 종교와 다양한 수준의 대화를 지속하고 있다. 또한 로만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는 제2바티칸 공의회(the Second Vatican Council,1962-5)에서 “신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바란다”는 원리를 제시했다. 즉 과거의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에서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서 신이 은연중에 익명의 방식으로 비기독교 신앙에서도 구원의 역사를 한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신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며, 타종교에게도 안간 존재를 계몽하는 진리의 광명이 비춘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Exclusivism, Inclusivism, Pluralism)

대화를 향한 태도의 스펙트럼은 다음의 세 가지 범주 또는 패러다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와 기독교 신앙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며 타종교들은 우상숭배라는 전통적인 신념인 배타주의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분명하고도 권위적인 신의 계시이지만 비기독교 종교에서도 신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포괄주의가 그것이다. 셋째, 기독교의 진리가 비기독교 신앙의 그것보다 더 높거나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다원주의가 마지막 세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배타주의 진영에서는 칼 바르트와 핸드릭 크래머(Hendrik Kraemer)가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바르트는 ‘신정통주의’(Neo-Orthodoxy)를 표방하며 기독교 계시의 독자성을 수호하려고 했다. 바르트는 ‘종교’와 ‘계시‘(revelation)를 각기 구분했다.

 반면에 선교사 출신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선교를 했던 경력을 갖고 있었던 핸드릭 크래머는 바르트를 수용하면서도 어느 정도 동양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보편주의를 거부했지만, 그래도 동서양의 종교적인 만남을 중요한 사건으로 여겼다. 그러나 보수적인 신학의 경계를 완전히 허문 것이 아니었다. 즉 그 역시 여전히 기독교적인 신학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포괄주의 진영은 가톨릭 오리엔탈리스트 학자인 재너(R. C. Zaehner)와 칼 라너(Karl Rahner)가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재너는  초기 저작에서는 모든 위대한 종교들이 교리상의 유사성이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사상을 거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법률이자 예언자일 뿐 아니라, 이란의 예언자와 현자까지도 구현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후기저작에서는 인도의 종교가 기독교를 심화시켜주는 통찰들을 열어 주었다는 평가를 내리면서 더 자유롭게 변하기도 했다. 알다시피, 포괄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종교에서도 신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로만 가톨릭에서 포괄주의적 패러다임을 주조한 사람이 바로 칼 라너였다. 그는 비기독교적 종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은총을 선의의 비신자들에게 중개(mediate)한다고 보았다. 틸리히의 경우는 대화를 많이 강조한 학자였다. 틸리히는 전통 기독교가 말하는 ‘인격신’(a quasi-human person)보다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으로서의 신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래서 일본의 선불교에서의 깨달음(satori)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계시가 기독교 신앙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며 파편화 되어 각 종교에 구현되어 있으며, 인간 생존의 문제에 하나의 대답을 구체화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 

다원주의 진영의 학자들은 니니안 스마트, 존 힉(John Hick), 존 콥(John Cobb), 한스 큉(Hans Küng)폴 니터(Paul Knitter), 레이문도 파니카(Raimund Panikkar),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 등 다수의 학자들이 포진되어 있다.  이들은 어떤 종교도 다른 종교보다 더 규범적이고 우월하지 않으며, 모든 종교는 역사적, 문화적 조건 속에서 그들 스스로의 방식으로 만들어져 왔다고 주장했다. 폴 니터는 기독교의 유일무이한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를 요구했으며, 존 힉은 기독교가 자기 중심적인 입장을 버리고 다른 종교와의 관계를 모색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Copernican revolution)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큉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는 “오랜 신앙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풍부해진다는 것을 배우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큉이나 콥이 상대주의적 관점까지 전부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큉의 경우, 다원주의적 시각 아래에서 “어느 것이든 다 좋다는 것은 값싼 관용”이며, “성립될 수 없는 신앙무차별론”을 반대했다. 즉 모든 종교를 동등하게 여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주의의 쟁점은 동서양의 종교적 대화를 당대의 첨예란 해석학적 논쟁으로 이끌었다. 즉 종교 간의 대화가 기독교나 불교도의 자의식적인 상호대조나 인공적인 양극화가 없이 순수하게 해석학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같은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각 종교적 교의의 복잡함과 풍부함을 간과할 위험이 있으며, 동시에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무시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동서양 종교 간의 대화가 제국주의적 혐의를 가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조셉 기타가와(Joseph Kitagawa)는 “서구 교회의 선교사업의 파산을 은폐하려는 책략”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닌가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것으로 대화의 노력을 접어야 할까? 아닐 것이다.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대화를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즉 대화 자체가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심지어 기독교와 유교 간의 대화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대화를 향한 운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1. 영성적인 수행에서의 대화(Dialogue in Spiritual Practice)

위에서 살펴 본 것들은 대부분 신학적, 철학적 수준의 대화였다면, 이제는 영성적인 수행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에 대해 간략히 논의보도록 하자. 최근 동양적인 명상법이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관심을 얻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월리엄 존스턴(William Johnston)은 이를 두고 “기독교적 영성의 혁명”이라고까지 극찬을 했다. 또한 동양의 경전 일부를 채택하려는 용감한 기독교인들도 있다. 즉 베단타 문헌 선집과 찬송가를 기독교의 예배에 통합키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했다. 베네딕트 수도사인 앙리 르소(Henri le Saux)가 대표적이다. 

아마도 기독교와 동양의 정신적인 수행방법의 통합을 제안했던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인물은 트라피스트(Trappist)의 수도사였던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일 것이다. 그는 동양의 현자들의 가르침과 실천을 연구하여,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 명상과 신비주의적 전통을 조명하려고 했다. 특히 선수행에 대해서는 “서양에 도움이 되는 통찰과 의식의 현상학과 형이상학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이렇듯 동양 전통의 영적이며 정신적인 수행들이 기독교의 수도사와 명상가들에게서 수행적인 수준의 대화와 실천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학적, 철학적 수준의 대화와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심층적인 차원의 종교 간 만남과 대화는 자신이 속한 종교 전통에 대한 믿음을 퇴락시키거나 파괴시킬 것이라는 우려와는 다르게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해줄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라 더 깊고 너른 하늘을 직시하고 세상 밖으로 과감하게 첫발을 내딛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