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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니고데모, 질문을 갖다”


 
1.        손실기피와 질문 사이에서 사람

1985 4 23타임 훗날마케팅 역사상 10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대실수라고 말하는 어떠한 결정이 내려진 날이었다. 그들 저지른 대실수란 당시의 사람들이 펩시콜라가 출시되고 펩시콜라의 단맛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시장의 선두자리를 위협받게 되자 코카콜라에서 전통적인 제조방식을 버리고 펩시콜라를 따라 새로운 단맛이 첨가된 소위 뉴코크, 뉴코카콜라를 출시하기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의 사장이었던 코카콜라의 도널드 커프는 오랫동안 블라인드 테스트(눈가리고 어떤 것이 맛이 있는 콜라인가 여러 번에 걸쳐 시험) 통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도널드 커프의 지휘 아래 코카콜라가 실시한 블라인드 테스트는 뉴코크에 대한 선호도에 관한 조사로 1981년에서 1984 사이에 전역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중에 45%만이 오리지널이 좋다고 했고, 55% 사람은 새로운 코크, 뉴코크가 낫다고 답했다. 여기에 어느 것이 뉴코크인지 알려주고 행한 실험에서도 6% 높은 사람의 숫자가 뉴코크의 단맛이 낫다고 답변을 했다.


하지만
많은 코카콜라 팬들이 새로운 콜라, 뉴코카콜라가 아니라 오리지널 콜라로 돌려달라고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일회성 시위에 성이 차지 않았는지 시애틀 거주하는게이 멀린스라는 은퇴자는 콜라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의 모임 만들어서 만들어 조직적인 뉴코크 반대 운동을 펼치기까지 했다. 반대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뉴코크 반대 운동 사무실로 무려 6만통이 넘는 응원전화를 걸어 그의 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에 고무된 게이 멀린즈는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뱃지, T-Shirt 등을 제작, 배포하고 심지어 집단소송에까지 나아갔다. 물론, 연방법원 판사가 소송을 해프닝으로 판단하고 바로 기각을 했지만 집단 소송까지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뉴코카콜라를 반대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중에
알려진 재미있는 사실은 게이 멀린스도 소위 블라인드 테스트라는 것에 참여했는데 그가 고른 맛있는 코카콜라가 오리지널이 아니라 뉴코크였다는 것이다. 게이 멀린스뿐만 아니라 뉴코크를 올드팬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보다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진하게 느꼈기에 블라인드 테스트의 결과가 어찌되었든 오리지널 코크가 좋다고 여긴 것이다. 이들은 오리지널 코카콜라를 그토록 지지했던 것일까? 어떤 심리적 작용이 그들을 그렇게 이끈 것일까? 로버트 차알디니 교수의 저서, “설득의 심리학2”에서 점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심리학에서는 이런 심리상태를손실기피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하고자 한다. , 실제로는 잃어 버린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무엇인가를 잃어 버렸다는 생각에 새로운 거래나 변화를 꺼리는 심리상황을손실기피라고 일컫는다. 물론 손실기피라는 심리상태는 중요한 결정 상황에서 신중한 선택을 유도한 점에서 잇점이 있다고 있다.


그러나
손실에 대한 기피 심리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하거나 개척하는 상황에서는 반발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불리하다.  마치, 코카콜라가 새로운 뉴코크를 런칭하고서 직면했던 반발 작용처럼 말이다. 손실기피의 심리가 작용할 때에는 객관적인 증거(블라인드 테스트 결과)조차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과거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새로운 것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종종  있어왔다.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속담 속에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이 담고 있는 심리상황이 비슷할 같다. 손실기피에 의존해서 새것을 막고 싶은 사람에겐 언제나 구관은 명관일 밖에 없다. 마치 오리지널 코카콜라의 맛이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낫다고 생각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의 모험을 주저할 때가 많다. 새로움은 분명 좋을 있지만 동시에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낯선 것들과의 이별을 해야 하기에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사람의 육체적 나이가 들수록 새로움을 회피하고 싶은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이들은
나이 어른들과 달리 그들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새로운 것이기에 새로운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삶의 경험이나 기억이 적은 아이들은 손실을 기피에 대한 반발심리나 두려움이 성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그래서 아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성인에 비해 밖에 없다. 결국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호기심은 아이들을 변화,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밖에 없다. 아이들에겐 모든 세상이 새로울 밖에 없으니 딱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도 아닐테니까 말이다. 아이들에게 손실기피가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호기심에서 기인한다고 있다. 또한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의 특징은 바로 질문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사실 궁금한 것이 많을수록 질문은 많은 생기는 법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알게 사실인데, 아이들에 호기심의 비례만큼 질문이 많다. 문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질문을 만들어 내고 질문은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진정한 기초가 된다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호기심과 질문은 우리의 사고들 폭넓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있다. 그와 같은 예들은 많이 발견된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특이한 질문을 입사면접 과정에서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실제로는 마이크로소프트 직원들도 정답을 모르는 질문들을 많이 한다. ‘조엘 소프트웨어 유명세를 얻은 조엘도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일할 때에 "M&M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라는 질문을 만들어냈다. 질문을 처음 물었을 때에 자신도 M&M 공장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몰랐다고 한다. 조엘은 그런 엉뚱한 질문을 통해서 자신의 창의적인 사고를 확장시켜 나갈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스티브 발머가 동료와 함께 조깅중에 문득 "맨홀 뚜껑은 동그랗지?" 라고 물었는데, 동료가 "그거 면접 질문으로 좋겠구만" 해서 또한 신입사원 면접 문제로 제출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질문은 받은 신입사원 후보자들은 아마도 당황을 했을 것이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을 동원해서 어떠한 답변이라도 만들어내야만 했다. 이런 논리적 과정들이 바로 창의적인 사고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고 마이크로소프사의 면접관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질문은 언제나 답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질문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어떠한 문제의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질문을 시작하는 시점부터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을 떼었다고 말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손실기피, 호기심과 질문의 이야기를 문두에 던져 놓은 같아 어리둥절 했을 것이다. 신앙과 호기심, 질문이 무슨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성서에 등장한 신앙인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를 소개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호기심그리고 질문이라는 단어로 그를 소개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여기게 되었다. 적어도 그는 손실기피라는 심리적, 사회적 상황을 그가 품었던 호기심 질문 통해 헤쳐 나갈 있었다. 그렇다면 인물은 누구이며, 그가 품었던 호기심과 질문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신약성서 요한복음 3장은 신앙인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인물은 다름이 아니라 니고데모라는 유대인이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그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질문했다. 그의 사회적 위치나 상황은 결코 질문과 답변의 이야기를 따라 가보록 것이다.


요한복음
3장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 니고데모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니고데모에 관한 성경 속에서의 언급은 요한복음 3 외에 요한복음 7 50, 51, 52절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에 대해 잡아다가 처벌하려고 하자 중에 사람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행한 것을 아리기 전에 판결하느냐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변호하다가 갈릴리당으로 몰린다. 또한 요한복음 19 39절에서 일찍 예수께 밤에 나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향품과 함께 세마포에 쌌더라 표현이 나온다. 요한복음 19장은 밤에 왔던 니고데모를 독자들에게 상기시켜주고는 그가 일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몰리자 변호하는 것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백근, 33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몰약과 침향을 가져다가 시체를 수습하는 일이었다고 말씀한다. 요한복음 3 외에 나타난 가지 묘사는 니고데모가 오늘 본문의 대화 가운데 분명한 변화가 있었고,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요한복음
3 1절은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었으며, 유대인의 관원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었는데 산헤드린 공의회의 역할은 유대 나라가 로마의 속국이 되기 이전에는 사법, 정치, 종교 모든 면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던 의회기관이었다. 로마의 통치를 받게 이후에는 역할이 전에 비해 축소되었지만 종교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관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니고데모가 공의회 일원이었는데다가 관원이었고 서기관이었다. 이런 그에 대한 설명은 두말 없이 사회적 지위가 결코 낮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니고데모는 유대지역에서는 유력가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가 속한 가문은 명문가였던 같다. 독일 성서공회판 주석에 의하면, BC 63년에 유대-로마 전쟁에서 당시 유대 지도자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로마 폼페이우스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고 보내 사람의 이름이 니고데모였다고 한다. 거기다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자 할때에 자신들을 포위한 로마군인과 교섭한 사람, 고리온이 바로 니고데모의 아들이었다고 증언한다. 위에서 언급된 이름인 니고데모 모두 집안 사람임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니고데모의 집안이 매우 유력한 집안의 사람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2.           니고데모, 의문을 품다

니고데모는 의문을 품었다. 그는 평생 의문을 풀려고 노력했지만 의문은 쉽게 풀려지지 않았던 것같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려는 자체가 그리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성경은 그가밤에왔다는 사실을 여러번 지적한다. 그가 어둠이 깔린 시각에 예수님을 찾은 것은 남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유대의 관원이었고,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젊은이를 만나 대화를 시도하려는 자체가 쉬운 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알려졌다시피, 예수님 당시에는 수많은 메시야라 지칭하는 사람들이 출현했다가는 사라지는 비일비재한 소위 메시야 출현 대한 사회적 피로도 높은 시기였다. 싯체말로 한다면 사이비 종교 교주들 대거 출몰했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하는 시기였다고 지칭할 있을 같다. 그래서 잘못하면 만남을 통해 스캔들의 중심에 수도 있는 그런 만남을 니고데모는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손실기피에 대한 반대적 힘을 넘어설 만한 강력한 호기심과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니고데모는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그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해서 답답해하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가 품은 의문은 당시 유대인들 모두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질문이었다. 바로 영생을 어떻게 얻느냐에 관한 질문이었다. 마가복음 10 17절에도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을 얻기 위해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느냐?” 질문한다. 아마도 예수님의 사역 내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니고데모에게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었던 것이다. 요한복음 3장의 상황에서는 물론 질문은 전해지지 않고 예수님의 대답만 나오기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질문했는지는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유추해볼 때에 니고데모도 마가복음에 등장한 젊은이와 같은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던진 같다.


질문은
좋은 대답을 이끌어내는 힘이있다. 사실 질문이 없다면 거기에 대한 답도 없다. 우리는 질문한만큼 답을 얻을 있다. 왜냐하면 질문은 이미 답의 범위를 설정해주기에 질문자 역시 답을 아는 경우가 허다하다. 2008 8 11 타임기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부자 중에 하나인 게이츠의 글이 실렸다. 글의 제목은, “How to Fix Capitalism?” 어떻게 자본주의를 고칠 것인가?”라는 기고문이었다. 기고문을 통해 게이츠는 소위창조적인 자본주의, 창조적인 자본주의자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게이츠에 의하면 자신은 지난 30 십년간 가정의 책상 위에 컴퓨터를 올려 놓는 것을 위한 운동을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난 10 전부터는 1달러가 없어 죽어 가는 사람, 그리고, 어떻게 예방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약이 없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변화 이끄는 운동에 일하고 전한다. 실제로 그는 앤드 멜린다 파운데이션 설립해서 자신이 쌓은 막대한 부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위한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물론 경제적인 위기에 놓여 있지만 그것은 잠시 일뿐 세상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 말이다. 그러면서 세상의 많은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윤을 자신들의 부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나누기 위해서 쓰고 있다 주장한다. 그런 운동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세상은 좋아질 것이라는 바로 세계 최고의 갑부인 게이츠의 전망인 것이다.  게이츠의 질문은 어떻게 자본주의를 고칠 것인가?’이다. 그는 명실공히 세계 제일의 부자이지만 결코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 그의 삶을 대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점에서 놀랍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가 세우고 은퇴한 마이크로소프트는 지구상에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이다. 그곳을 마다한채, 사회의 구석적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가난과 질병을 퇴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세상을 향해 던지는 그의 화두가 자못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현답이 답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좋은 질문은 좋은 답변을 얻기 위한 구역 설정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것이다.


니고데모는
알려진 바와 같이 학식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묻는 것은 고사하고 찾는 것조차 니고데모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성서에도 인용되었듯이 당시 사람들이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정도로 나사렛은 시골 중에 가장 한적한 곳이었다. 거기에서 오신 예수님을 찾아 가서어떻게하면 영생, 하나님 나라에 들어 있느냐 묻는 니고데모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물론 사회적인 요소들, 주변환경이 방해요소로 작용하고 있지만 질문에 사로잡히 니고데모에게는 밤을 틈타서라고 찾아와 묻고 풀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품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궁금증은 그의 지식, 학덕, 배움 어느 것도 답변을 해주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살아가는 인생살이의 시간만큼이나 의문과 질문은 커져갔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예수님에게 온다. 이렇게 일반화 시키기는 것에는 오류가 있다고 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한번쯤은 갖게 된다. 물론 거기에는 신에 대한 질문을 포괄하고 있다. 신학자 틸리히는 이것을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니고데모는 이런 근원적인 두려움, 또는 존재론적인 의문 앞에 도달해서 높은 벽을 느꼈을 것이다. 수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니고데모는 신뢰할만한 답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밤을 틈타 예수님을 찾아오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이 니고데모가 품었던 의문의 깊이와 갈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니고데모의 질문을 답변을 것일까?



3.        예수, 질문에 답하시다

어느 로마인이 랍비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랍비에게 다음과 같이 뜸금없이 질문을 했다. “당신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것이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나에게 알려준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을 것이요.” 아마도 로마인은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얻어 내고 싶었던 것이다. 매우 합리적인 삶을 추구한 로마인다운 질문이며 요구였다. 그런 그의 요구를 들은 랍비는 말없이 그를 조용히 데리고 나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태양을 쳐다보시오.” 그러자, 태양을 한번 쳐다보고는 로마인은 매우 짜증섞인 말로 랍비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어거지 소리 마시오. 누가 태양을 정면으로 쳐다볼 있겠소.” 그제서야, 랍비가 그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 당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많은 것들 중에 하나인 태양 하나도  똑바로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위대하신 하나님을 있단 말이오.” 로마인이 랍비에게 요구한 것처럼 우리는 종종 단순 명료한 답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태양보다도 위대하신 존재인 것이다. 그런 존재를 어떻게 단순명료하게 묘사할 있을까? 니고데모 역시 자신의 갖고 있던 지식의 숲에서 결국 가장 단순해보이지만 가장 어렵고 민감한 문제에 봉착하게 것이다. 그제서야 예수님을 찾아나서 이렇게 밤에 만나 명쾌한 논리와 주장의 답변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도 이와같지는 않을까? 우리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증거와 답변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물음에 뭐라고 대답하셨을까? 요한복음 3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느니라우리 성경에는 분명히 거듭나다라고 표현했는데, 그리스어 원어로는 겐네데 아노텐이다. 사실 단어는 본뜻이다시라는 부사의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또한위로부터, 하늘로부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 겐네데 아노텐은 단순히 거듭나다라는 뜻만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하늘로부터, 위로부터라는 신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늘로부터, 위로부터 변화는 구원이 우리의 인식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구원은 신비의 영역이지 이성의 영역이 결코 아니다. 이어지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담화에서도 예수님은 성령을 예로 들면서 구원 사건이 철저히 신비적인 영역임을 암시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의 사건을 경험할 없다. 다시 말하건데 맥락에서 때에 구원은 인간의 인식의 범위가 아닌 것이다. 


니고데모는
답변에 저윽이 당황했던 모양이다. 니고데모가 던진 다음의 질문은 그가 답변 앞에 얼마나 당황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니고데모는 대답을 듣고 갑자기 멍해졌던 것같다. 그의 학식도 조예를 고려해보건데 요한복음 3 4절에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있삽니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 갔다가 있삽나이까?” 나타난 질문은 너무나 엉뚱하다. 아마도 니고데모가 다시는 낳는 , 위로부터 낳는 , 하늘로부터의 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무슨 말을 없어 그냥 생각는데로 내뱉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알다시피 니고데모는 평생 율법을 공부했던 사람이다. 율법이 요구하는 하지말아야 것과 준수해야 것들 조목조목 적어 놓고 준수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니고데모의 인식의 영역은 확고하게 율법의 범주 아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율법을 제껴 놓은 구원에 관한 답변에 그는 저윽이 놀란 하다. 적어도 그의 관념 속에서 구원은 율법 준수와 관련을 준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는 너무나 낯설고, 어쩌면 이상하게 들리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엉뚱해보이고 바보스럽게 보이는 질문을 던지게 같다. 사실 질문한다고 찾아와서 현자의 답변을 대놓고 무시하기에는 니고데모가 젊잖은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엉뚱해보이는 질문은 예수님에게 대답을 명확하게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간혹, 이렇게 엉뚱한 발상이나 질문은 명확한 답을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적인 솔직함은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어지는 덕목이기도 하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있고,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가장 어려울 때가 있다. 의도했던 아니면 전혀 그런 것이 아니든 간에 적어도 니고데모의 엉뚱한 질문은 답을 명확하게 이끄는 길이 되었지만 동시에 자신 스스로가 편견을 깨고 나오는 힘이 되어 주었다.


편견
이야기가 나오서 인데 편견은 단순히 편견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설정한 편견에 사로잡힐 때에 너머에 있는 긍정적인 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편견이 바로 선입견일 것이다. ‘The Power of Mindlessness’ (마음비움의 ) 저자인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앨런 랭거(Ellen Langer)교수는 사람들은 선입견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제한한다고 말한다. 랭거 교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평생 전문적으로 그림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갇혀 있는 편견의 벽을 넘어 무념의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다. 놀랍게도 랭거 교수는 편견을 없앤 상태에서 그림을 그르게 되자 매우 창의적인 그림을 그릴 있게 되었고, 그녀의 그림이 심리학회지에 실리는 영광까지 얻게 된다. 랭거 교수는 자신이 만약 하지 못한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없었을 말하면서 그냥 무념의 상태, 마음 비움의 상태, 선입견을 배제하자 자신 안에 있는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선입관이라는 편견은 우리의 사고뿐만 아나라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까지 제한하게 된다.  USC대학, 남가주대학의 총장인 스티브 샘플은창의적인 리더가 되려면 고정관념의 교실로부터 탈출하라 말합니다. 그리고는, 학생들에게 아인슈타인이나 피카소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려면 괴짜 리더쉽을 가지라고 말한다. 괴짜란, “고정관념을 깨는 사람을 말한다. 리더는 고정관념의 교실에서 뛰쳐나와생각의 고인 아니라생각의 흐르는 몸을 적시고 그것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비관적인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때에  자기 안에 숨겨져 있는 창의성이 발현할 있다. 이것이 바로 스티브 샘플이 말하는괴짜 리더쉽이라는 개념이다. 이러한 창의적인 생각은 선입견이나 편견,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에만 가능하다. 고정관념의 세계에서 나 올수 있는 창은 바로 질문이다. 의문을 갖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창의적인 사고나 아이디어는 결코 현실화가 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질문은 바로 창의적 사고로 이끄는 창문인 것이다. 


니고데모의
엉뚱한 질문, 바보스러운 질문은 그의 몰이해와 오해, 편견을 드러내지만 그에게 질문의 힘이 있었다. 바보스런 질문이 자신의 머릿 속에만 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질문에 대답 해주실 수 있었다. 즉 질문을 통해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내면과 대화를 하실 수 있었고, 질의를 통해 또한 거듭남에 대해 말씀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사람은 이러하니라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없다고 말씀하신다. 참 아리송한 말이다. 물은 무엇이고 성령은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니고데모는 저윽이 당황했을 것이다. 그의 속마음을 아셨던 예수님은 성령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바람이란 소재를 사용하신다. 사실 바람은 불때에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존재를 의심할 수 없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 고대인들에게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매우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특히 서양인들에게 성령은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동양인들에게는 ’라는 개념이 있었기에 바람을 기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서양인들에게 바람은 신기, 신비 자체였던 것이다. 이 바람의 비유는 설명이 됨과 동시에 니고데모에게 여전히 아리송한 의문을 갖게하는 답변이었을 것이다. 아니 니고데모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여전히 신비이긴 하지만 말이다. 

 

4.     의문을 벗고 신비 속으로

다시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질문한다.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있나이까?” 바로 이 말씀이 니고데모가 알쏭달쏭한 상태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그런 니고데모의 질문에  예수님은 답변이 아니라 믿음을 말씀하신다. 11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사실 니고데모가 얻고자 하는 답변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떻하면 됩니까? 자신의 이성적인 범위 안에서의 답변을 그는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해가 아니라 믿음이 우선이라고 답변하신다. 신앙은 이성적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신념과 신뢰의 영역에 머문다. 어찌보면 믿지 아니하려는 사람에게 증거는 아무런 효력이 발휘할 수 없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믿으려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갖다가 제시해도 사실이라고 수긍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다. 사실 여기에 신비가 있다. 이해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니고데모는 여기에서 방향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먼저 이해되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믿음으로 쉽게 수긍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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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 않고 믿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12절에,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진실은 고사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있는 땅의 일을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믿겠냐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다. 어찌보면 거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의 본질은 이행의 선행이 아니라 믿음임을 지적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믿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증거라고 제시하는 것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다.


드류대학교의
선교학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레너드 스윗의 중에의문을 벗고 신비 속으로라는 책이 있다. 저서에서 레너드 스윗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짚어 주고 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의문에 답하시지 않고 우리를 신비 속으로 부르신다" 말한다. 신앙은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이지 이해를 추구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신비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그곳에서 이해라는 인식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레너드 스윗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으로 부르신다 말한다. 신앙은 관계형성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되면 인식의 작용은 뒷따라 오게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리나 명제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분은 관계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는 모든 의문에 해답을 주시기보다, 당신 자신과 맺는신적 관계 신비 속으로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가 들어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관계를 위해, 친밀한 부대낌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다.” 여기에 명쾌한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먼저 니고데모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도대체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신비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터무니 없는 것이 어디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의 모든 의문점을 해결해 주시고자 원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니고데모에게 더 생각할 꺼리를 던져 주신 것이다. 생각의 틀을 인식작용의 범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계로 전환하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를 하나님의 관계의 장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계회복의 걸음은 바로믿음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사실 신비가 있다. “의문을 너머 신비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