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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조각들...

지적 설계론과 진화론


Kenneth J. Collins 

  Power, Politics and the Fragmentation ofEvangelicalism


Ch.4, “Evolution, Intelligence Design and the Transformation of Culture?”





최근에 복음주의 진영에서 창조와 관련되어 제기되고 있는 ‘지적 설계론’(Intelligence Design)이 있다. 이 이론은 단순히 진화론의 대항하는 지적운동으로만 여겨져 왔지만 사실은 복음주의 진영의 학문적, 지적, 문화적 전략이 망라된 운동이다. 즉 오랜 축적물을 바탕으로 진화론에 일종의 쐐기를 박는 쐐기운동으로 학문 활동의 유신론적 대안 운동으로 전개되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케네스 콜린스(Kenneth J. Collins)는 4장에서 지적 설계론과 관련된 사항들을 짚어 가면서 복음주의의 지적 설계운동의 배경적, 사회적, 학문적, 문화적 맥락을 다루고 싶어 한다.  

조지 부시(George Bush) 대통령 당선 이후 복음주의 진영의 정치적인 자산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 종교 비평가들에 의해 기독교 신앙과 공화당 정치 진영의 이상하고 새로운 조합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즉 그 말은 복음주의가 정치적인 영향력이 중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중요한 문화적인 영역에서 발자취가 부족함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또한 복음주의 진영이 아직은 테네시(Tennessee) 데이튼(Dayton)에 있었던 스코프 재판(Scope Trial)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5년에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에 의해서 진화론을 기소한 재판이 스코프 재판이었다. 그리고 재판을 제기했던 그는 깨닫지 못했지만 재판의 지적 배경에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 근본주의 흐름은 프린스턴 학파로 불리던 찰스 하지(Charles Hodge), 워필드(B. B. Warfield)의 유산뿐만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 청교도적, 개혁주의 지적 흐름에 맥을 잇고 있었다. 

진화론을 최초로 심판대에 올렸던 이 스코프 재판은 ‘원숭이 재판’(monkey trial)이라는 오명과 함께 근본주의 진영의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몇 차례에 걸쳐 진화론에 관련된 재판이 있었다. 예를 들어, 에퍼슨(Epperson) 재판에서는 창조론(creationism)을 진화론과 함께 가르칠 수 있도록 청원을 했고,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도버(Dover)에서 ‘지적설계론’을 9학년의 과학교육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청원운동을 하였다. 물론 이후에 이어진 재판에서 진화론은 제외한 창조론이나 지적 설계론이 정규 과학적 교육 커리큘럼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 때문에 지적 설계론을 단순히 스코프 재판의 후임자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적 설계론은 진화론을 겨냥한 생물학 분야에서 가장 과학적으로 발전된 과학 중에 하나이다. 


1. 네오다윈주의(Neo-Darwinism)로써의 진화론과 수용자들

제리 코인(Jerry Coyne)은 현대 진화론(네오다윈주의)을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중요한 요소를 제시했다. 1)진화, 2)점진론(gradualism), 3) 종의 분화, 4) 공통의 조상, 5) 자연선택설(natural selection), 6) 진화론적 변화의 비선택적인 구조(nonselective mechanism)가 그들이다. 이에 반해서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는 복음주의적 철학가로 진화론에서 가르치고 있고 다섯 가지 공통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지구는 매우 오래 되었다. 2) 생명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되었다. 3) 생명은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다. 4) 진화의 단계는 자연주의적 용어로 이해되어야 한다. 5) 신의 개입이 없이 무생물적인 요소에서 생명이 발생하였다. 특히 진화론자들은 유신론자들을 비판하는데, 가장 중요한 비판 지점 중에 하나가 ‘생명은 오래되었다’는 개념에서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의 지적설계운동을 전개하는 마이클 베히(Michael Behe)나 윌리엄 뎀스키(William Dembski)도 ‘생명 그 자체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네오다윈주의자들 역시 애초 다윈(Darwin)이 주장했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다윈은 적자생존을 통한 적응을 위한 변화와 ‘자연선택’과 유전적인 돌연변이(mutation) 등과 같은 자연에 의한 선택의 다양성을 제시했다. 물론 네오다윈주의 돌연변이가 진화의 동력이라는 것과 다윈의 여타 개념들을 수용했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슨(Richard Dawkins)은 자연선택은 축적된 과정(cumulative process)이며 진화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산악인 한 번에 산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한걸음, 한걸음 산을 위해 올라가는 과정이 진화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적자생존과 같은 자연선택은 오랜 과정의 결과라는 수정을 가한 것이다. 

또한 네오다윈주의자들은 진화에서 기본적으로 목적론적인 관념(목표의 지향성)을 배제시키고 있다. 오직 도구적이며, 물질적인 인과관계를 인정하려고만 든다. 하지만 적어도 산의 정상을 향해 걸어가듯이 정상은 일종의 그 여정의 목표, 목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다윈은 결코 자연이 목적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면서 선택하는 존재라고 보지 않았다. 네오다윈주의의 중요한 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와 빅터 스텡거(Viktor Stenger)는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지 전통적인 신학이 말한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진화는 발전이라는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에는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와 월리엄 뎀스키가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이들은 창조주로써의 하나님을 인정한다. 그 나머지는 진화론의 설명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콜린스는 칼 깁버슨(Karl Giberson)은 지적 설계론과 자신들과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즉 기본적으로 우주는 지적인 설계에 의해서 세워졌으며, 지적 설계론과 매우 유사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성경을 기반으로 한 연구기관인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목적과도 유사하다고 말한다. 이들은 우주의 모든 배경 뒤에는 그것을 만든 정신(mind)가 있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신은 자연적 진화의 배후가 되는 존재로 ‘무작위적인 설계자’(Random Designer)이다. 무작위적인 신은 돌연변이와 이어지는 자연적 선택을 용인하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종교적인 신앙과 과학이 완벽하게 양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문제점이 있다. 과연 신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즉 ‘무작위의 설계자가 있다는 것과 설계자가 없다는 것과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말끔하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 또한 이들이 말하는 무작위적인 설계자라는 용어는 순수하며 단순하게 과학적이지 못한 신학적 수고에 가깝다는 점에서 과학계와 교계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 다르게 네오다윈주의자들은 유전적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은 충분한 설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무작위적인 설계자’처럼 논리에서 불필요한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이론은 ‘오캄의 면도날’(Occam’s razor)의 논리를 들어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여긴다. 즉 단순한 설명이 가장 좋은 설명이며 참에 가까운데, 굳이 무작위적인 설계자를 설명논리에 끼워 놓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들은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이론이 맞다 손 치더라도, 그러한 신은 매우 ‘게으른 신’(deus otiosus)이며, 숨어 버린 신으로 결국은 존재하기를 멈춘 신이라고 본다.


2. 지적 설계론과 그에 대한 비판 

이런 과학계의 흐름 속에 1980년대에 등장한 이론이 바로 지적 설계론이다. 다시 말해 기존 생물학에 대한 반감과 진화론에 대한 불만족에서 시작된 운동이었다. 지적 설계론자들은 우주와 생명 그 자체가 충분한 증거를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설명에 기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뎀스키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연적인 원인’과 ‘지적인 원인’ 사이에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지적 설계론은 지적인 인과론에 초점을 맞춘 설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단순히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유대교, 이슬람, 세속주의 유대교, 무신론자 그리고 심지어 반신론자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지적 설계론이 결코 하나님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전략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지적 설계론은 다음과 같은 지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다. 이 운동이 단순히 다윈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생물학적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고, 나아가 문화적인 영역까지 확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경험적인 근거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지적인 움직임이고 싶어 한다. 사실 진화론은 경험적인 근거가 미약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예컨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설은 생명의 발전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필립 존슨(Phillip Johnson)은 자연선택설은 이미 존재한 것을 보존하거나 파괴시키는 외에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돌연변이 역시 종의 다양성을 만들어 가는 것에 있어서 매우 제한적인 영향만을 주었다. 다시 말해 자연선택설과 돌연변이의 등장은 모든 것을 설명해내는 ‘마법의 총알’(magic bullet)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이클 베히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라는 개념을 가지고 진화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일찍이 다윈의 그의 저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에서 ‘어떤 완벽한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자신의 이론은 무너질 것이다’고 했다. 베히는 환원불가능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박테리아 편모의 모터(motor) 시스템을 설명하면서 그 증거를 제시한다. 즉 나선형 모양의 타입III의 분비 시스템을 가진 편모는 환원불가능한 완벽한 구조를 보여 준다. 그래서 진화된 것이 아니라 이미 완벽한 구조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박테리아 편모의 모터 시스템은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진화적 단계가 경험적인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발휘해 메운 것임을 보여주는 예증이 된다.

윌리엄 뎀스키는 철학과 수학 분야에서 박사를 취득한 복음주의 학자이다. 그는 전공을 살려서 복잡한 구체적 정보를 통해 진화론이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비판한다. 예컨대, 우발-복잡성-구체성=설계라는 논리의 필터를 통해서 진화가 말하는 논리의 허구성을 짚어 내고 싶어 했다. 그는 지적 설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 또는 복음주의적 믿음이 아니라 수학과 정보 이론과 통계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에 진화론은 어떤 생물학적 또는 세포학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다양한 가능성을 희망적 숙고를 토대로만 만들어진 공상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경험적이고 통계적인 증거가 아니라 무한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이론이라고 본 것이었다. 

「와이어드」(Wired)의 수석 편집인인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은 ‘진화론을 신뢰한다고 해도 왜 살아 있는 생명세계가 그렇게 존재하는지 진화론은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연선택설은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연극의 모든 문제가 해결 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에 신이 나타나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의 방법을 뜻한다)와 같은 존재라고 비판한다. 케네스 콜린스는 그런 면에서 서구 과학이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logical naturalism)을 바탕으로 지적 설계론을 비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종교든 현대 과학이든 의심하는 것을 태생적으로 약하게 갖고 있다는 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방법론적인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지적 설계론은 두 가지 약점이 있다고 본다. 먼저 지적 설계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과학적 방법이라고 강변하지만 첫 번째 원인으로써의 ‘설계’를 이미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과학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본다. 둘째, 지적 설계론은 현대 과학이 말하는 과학적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즉 설계와 목적이라는 전제를 제시함으로써 과학이 아닌 신학 또는 형이상학적 철학에 다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럴까? 이미 언급했듯이 네오다윈주의자들은 지적 설계론이 형이상학과 목적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방법론상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한다. (지적 설계론이 최소한 하나님에 대한 주제는 상정하지 않으므로 이것까지 비판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적 설계론은 과학이 아닌 종교이며 상상 문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메드워(Medwar)는 비난한다. 뿐만 아니라 과학은 학문의 중립성과 객관성을 들어 학문적 태도를 비판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에서 현대 생물학자들은 자유로울까? 불행히도 현대 생물학 역시 자신들에 대한 비판 받기를 싫어한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피하려고 무지 애쓴다. 그리고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자주 자신들의 ‘교조적인 관점’으로 견지하고 있다. 그것은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고, 나아가 비판에 열려 있지 않는 학문 공동체를 보여주지도 못한다. 과연 이들은 자신들이 제기한 방법론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것일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현대 과학자들은 지적 설계론이 ‘형이상학적 자연주의’(metaphysical naturalism)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이 용어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와는 반대적 의미를 가진 개념이다. 즉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는 자신들의 세계관에 경도된 철학으로 학문적 전제 조건으로 설계와 목적을 제시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지적 설계론은 시초에서부터 ‘설계’로 시작하고, 마지막은 ‘목적’을 제시하기 때문에 과학일 수 없다고 본다. 역으로 필립 존스는 그렇게 비판하는 과학자들 역시 이미 철학적 관념을 자신들의 학문성에 강하게 배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론이라는 ‘방법론적인 자연주의’ 역시 형이상학적 가정(신은 없다)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들의 과학적 교리(doctrine)에 벗어나는 어떠한 비판도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다윈주의 역시 매우 형이상학적이며, 교리적인 자세이다. 다시 말해, 과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과학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지적 설계론에 대한 비판에 네오다윈주의자들은 집착하는 것일까? 네오다윈주의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무신론자들이며, 반신론자이기도 하다. 이런 언급이 있다. ‘진화론은 반신론자들이 발견한 가장 위대한 동력(engine)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진화론이 공격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적 설계론과 진화론의 문제는 진위의 문제이기 보다는 좀 더 권력(power)의 문제에 가깝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적 설계론자들의 전략이 필요하다. 지식의 배제와 진위여부는 바로 권력이 창조해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 역시 문화적 전략을 가지고 접근하려고 한다. 내부에서의 정보 교환에 만족하지 않고 법정 투쟁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정당성과 관심을 얻으려고 한다. 또한 과거 자신들이 배제했던 우파인 창조주의자들과 좌파로 볼 수 있는 유신론적 진화론자들까지 모두를 아우르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