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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회학 글들

종교사회학의 새로운 패러다임(로드니 스탁, Acts of Faith)

"A New Look at Old Issues"

종교학과  박사과정

1. 발제를 시작하면서

이번 발제를 맡은 부분은 로드니 스탁(Rodney Stark, 이하 스탁), 로저 핑크(Roger Finke, 이하 핑크)의 저서 Acts of Faith의 첫 번째 장(Chapter 1)이다. 스탁은 다양한 학문적 관심과 저술활동으로 정평이 나있다. 예컨대, God's Battalion(2010)에서는 중세 십자군의 문제를, Cities of God(2007)에서는 초기 기독교의 성장배경을, The Victory of Reason(2006)에서는 기독교, 이성과 자본주의의 성장 사이의 상관관계를, The Rise of Christianity(1997)에서는 초기의 예수운동의 성장의 사회적 배경을 다루고 있다. 물론 자신의 주전공인 종교사회학 분과에 관련된 탁월한 저서가 많지만, 위에 언급된 저서들은 스탁이 종교사회학자임에 불구하고 보여준 지적 궤적의 넓이를 가늠케 하는 것들만 든 것이다.

그의 저서 첫 번째 장에서 스탁은 종교사회학에서 다룬 예전 이슈들(old issues)을 새롭게 재조명(a new look)하는 작업을 한다. 아마도 단어들 사이의 행간 의미를 짚어 본다면 이렇다. 예전 이슈들에서는 'old'라는 단어를 쓰는데 곧 '옛 패러다임'(old paradigm)을 지칭하며, 새로운 재조명은 'new'라는 단어를 쓰는데 '새로운 패러다임'(new paradigm)을 나타내고 있다. '옛 패러다임'을 다시금 살펴보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자리매김을 분명히 하고, 앞으로 나갈 학문적 방향을 제시하는 글이라고 하겠다. 덧붙어 그의 글을 쓰는 스타일을 언급을 하고 넘어가자면 이렇다. 이번 장은 스탁의 대가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우선 그가 언급하면서 평가를 하는 학자들의 숫자들 셈하더라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각각의 학자들을 범주별로 유형화하고 평가하는 내용들 역시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글 자체는 그만큼 유려하다. 그러나 워낙 다루는 양이 방대하다 보니까 쉽게 읽혀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글 속에 나타난 방대한 지식의 분량을 이 짧은 발제문 속에 다 담아낼 만큼 발제자 자신이 대가가 아님을 수업을 듣는 학우들이 이해해주기를 원하는 바램도 함께 덧붙여 본다.

 

2. 옛 패러다임의 주장과 그 한계

현재 종교사회학 학계는 큰 패러다임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 전환은 옛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shift)이다. 스탁이 지적한대로 종교사회학의 이론분야에서 오랫동안 신뢰와 존경받던 선배학자들의 이론들이 점점 퇴출되고 있다. 그리고 '놀라울'(so dramatic) 정도로 광범위하게 '패러다임의 전환'(a paradigm shift)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사실 패러다임의 전환은 과학적인 학문분야에서 늘 그렇듯이 경험적(empirical), 이론적 토대(theoretical basis) 위에서 이루어진다. 즉 기존 패러다임이 경험적 현상을 이론이라는 틀로 설명해내지 못했을 때에, 자연스럽게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옛 패러다임'의 어떤 면이 적합하지 않았던 것일까? 여기에서 옛 패러다임의 요소들을 살펴볼 필요성을 느낀다. 알다시피 과거 종교사회학의 틀거리가 명확하게 확립되어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종교는 '사회과학자들'(social scientists)의 주요한 관심이었고, 이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공통된 요소가 분명히 있었다. 스탁은 이것을 옛 패러다임의 '공통적인 핵심요소들(key issues)'라고 보았다. 그는 이 핵심적인 요소들을 이해하고 그 한계를 짚어 본다면, 앞으로 나갈 종교사회학의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선 스탁이 지적한 옛 패러다임의 공통적인 핵심요소 5가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과거의 연구자들은 종교를 거짓(false)이며 해로운(harmful) 것으로 여겼다. 좀 더 분명한 이해를 위해 학자들의 이름을 열거한다면, 막스(Karl Mark)와 엥겔스(Friedrich Engels)같은 사람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종교는 쇠퇴하는 운명에 처했다(doomed)는 견해이다.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적자였던 사회과학적 연구는 종교를 적대적 대상으로 보고 결국 소멸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한다. 셋째, 종교를 일종의 '병리적 부대현상'(epiphenomenon)으로 본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개념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바로 '투사'(reflection)'비정상적인 심리학'(abnormal psychology)라는 단어이다. 넷째, 종교를 근본적으로 심리학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종교를 단지 정신적 상태(mental states)에 관련된 심리로 보았다. 심지어 막스와 엥겔스는 인간의 심리를 병들게 하는 '아편'(opium)이라고 비판한다.

다섯째, 종교를 사회 체계의 일부분(as part of a social system)으로 보면서,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독점적 신앙의 우위성'(the superiority of monopoly faiths)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해를 위해 부연설명을 조금 하겠다. 뒤르켐(Emile Durkheim)은 종교가 만약 독점적 지위를 잃고 각각 경쟁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신자들은 자신의 종교를 논쟁거리와 의심의 대상으로 마주하게 된다. 끝내 종교는 신자들의 신뢰성을 잃게 되고, 점점 그 의미와 지위가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스티브 브루스(Steve Bruce)는 이렇게 말한다. 신자가 "선택한 종교는 '운명 지어진 종교'(a religion of fate)보다 약화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렇게 인식하게 된다. 신이 인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선택했다고 말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옛 패러다임은 종교의 긍정적인 측면을 제대로 평가하려고 하지 않았다. 스탁의 지적한 것처럼 무신론(atheism)의 정서가 바로 바로 그들의 기본적인 성향이었다. 이것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종교를 자신이 만든 인간의 이성적 종교, '인류교'(religion of humanity)로 대치하려고 했던 콩트(August Comte)의 시도처럼, 사회과학적 연구의 창시자들은 종교를 없애고 그 자리에 인간 이성이 깃들기를 바랬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무신론보다 한발 더 멀찍이 나간 '반종교'(antireligion) 또는 '반신론'(antitheism)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3.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과 그들의 주장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종교사회학에 관련된 하위분야(a subfield)의 급성장으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그때까지 널리 이용되던 옛 패러다임으로는 당시의 종교현상을 설명해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1973년에 찰스 글럭(Charles Y. Glock)과 필립 해몬드(Philip E. Hammond)는 이 사실을 인지했다. 그러면서 소위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스탁은 위에서 언급되어졌던, 다섯 가지의 핵심요소들을 여기에서 반박하는 것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성격을 분명하게 부각시킨다.

먼저, 종교가 비정상적인 심리학(abnormal psychology)라는 옛 패러다임을 반박한다. 옛 패러다임은 개인적 차원에서 종교를 본다면, 정신 병리 현상이고 그것은 곧 비정상적인 심리학이라고 주장한다. 스탁은 종교는 결코 정신 병리학에서 말하는 증상이거나 또한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오히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건강하다고 주장한다.

둘째, 아편이론(the opiate thesis)을 말했던 옛 패러다임을 잘못을 지적한다. 옛 패러다임이 '사회적 차원'(the level of society)에서 아편처럼 해롭다는 주장은 과학적 주장이라기 보다는 정치적(a political) 수사였다는 것이다. 종교는 오히려 중세 시대에 농민들과 장인들(artisans)에게 저항적 정신을 불어 넣는 각성제(amphetamine)의 역할을 했다. 아프리카와 북아메리카에서는 유럽의 지배를 반대하는 세력을 결집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아편이 될 수 있을까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이론화(new theorizing)가 정말로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셋째, 세속화 이론의 반대(against secularization)를 분명히 한다. 모든 사람의 예상과 다르게 종교집단의 참여와 현대화(modernization) 사이에는 일관성 있는 관련이 없다. 과학과의 관련성도 그렇다. 과학과 종교 간에는 어떤 상관성이 없다. 즉 과학의 발달과 종교의 세속화의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속화 이론은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넷째, 새로운 패러다임은 종교적 현상의 연구에 있어서 먼저 종교적 원인 또는 요인을 찾아야만 한다. 옛 패러다임의 추종자들은 종교현상의 진짜 '원인'(cause)을 종교 내부에서 찾지 않았다. 예를 들면 종교운동(religious movements)을 연구할 때에 사회적 원인을 먼저 찾았고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즉 재정적 억압, 인구과잉과 같은 원인들에서 그 심층적인 이유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은 종교현상을 종교 내부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예컨대 종교 지도자의 리더십, 교리의 측면,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들이 종교현상을 설명하는데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다섯째, 스탁은 새로운 패러다임은 사회적인 접근(social approaches), 즉 사회적 연구를 더 강조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물론 종교의 심리학적 측면이나 개인적 차원의 결과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자칫 종교를 집단적 종교현상이라기 보다는 쉽게 개인의 특성으로 축소시키는 부적절한 시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섯째, 스탁은 종교적인 경제(the religious economy) 측면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종교 조직은 결코 사회적으로 진공상태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종교 조직은 사회문화적 환경으로부터 결코 고립된 상태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종교조직의 연구는 사회문화적 환경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도입되는 이론이 바로 '종교적 경제'(a religious economy)이다. 현대사회에서 상업적 경제, 또는 시장 경쟁 상황을 말하지 않고 절대로 현대 사회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은 경제(economy)라는 개념 하에 시장과 경쟁이라는 사회문화적 상황들을 고려하고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연구가 바로 종교적 경제라고 보았다.

일곱째, 새로운 패러다임은 바로 '합리적 선택 이론'(rational choice theory)을 내세운다. 알다시피, 합리적 선택이란 경제학자들이 늘 고려하듯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는 선택일 것이다. 과거 옛 패러다임을 주장한 사람들은 합리적 선택이란 결국 종교가 축소되는 원인이라고 보았지만 스탁은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합리적 선택은 만족감이라는 보상을 주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유용하다고 보았다.

 

4. 발제를 마치며

시카고 대학교의 종교학자 조나단 스미스(Jonathan Z. Smith)"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바라본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바로 그와 같은 기분이 든다. 로드니 스탁이라는 위대한 학자의 어깨 위에 올라타 종교사회학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려다보는 그런 기회가 되었다. 과거는 분명히 무신론적 성향에 서서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종교가 양산하는 부정적인 결과물들에 집착하는 경향도 보여진다. 또한 종교를 그 자체로 사회적 연구의 원인으로 보려 하지 않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이 보기에는 종교는 사회의 부산물이지 결코 주요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종교는 쇠퇴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러나 문제점은 그들의 이해와 예측이 잘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종교사회학적 연구는 분명히 패러다임의 전환의 시기를 맞이했다. 이제는 과거의 이론들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종교를 부정적인 요소로 보고, 사라질 것으로 여기고, 또한 사회의 부산물로 여기는 한 우리는 현대 사회에 나타나는 종교의 부흥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새로운 패러다임은 분명히 스탁이 지적한 부분들을 수용하고 확대 발전 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나름대로 길은 분명해진 것 같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것도 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와 현실을 딛고 서면, 확실하게 보였던 것이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는 종교적 경제(religious economy)이론이 그렇다. 한국 사회에서 로만 가톨릭 교회의 성장은 경쟁(competition)과 시장(market)이라는 개념을 쉽게 풀어 낼 수 없는 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이론인 틀린 것이냐 묘하게도 한국 개신교 교단의 성장을 설명하는 데에는 또한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너무 베껴 먹어서 안맞는 것인가 그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론을 빌려오는 것을 그쳐야만 할까?

사실, "내가 더 멀리 보아왔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오." 1676년 뉴턴(Issac Newton)이 훅(Robert Hook)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쓴 것이다. 다시 말해 조나단 스미스도 이 말을 인용한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것들을 재조명하고 때론 인용하면서 발전해나간다. 과거가 없는 오늘이란 분명히 없다. 스탁이 과거의 학자들을 재조명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자리매김한 것처럼 우리도 선배학자들의 연구를 되새겨보고 오늘 우리 상황에 맞는 학문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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