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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컬럼

"우리가 정말 알아 할 것들은…"

     

지난 주 타임(TIME, 11 12일 자)지에는 커버스토리로 ‘2007년 가장 최고의 발명품에 관련된 것이었다. 타임지는 올해의 가장 최고의 발명품으로 아이폰(iPhone)으로 꼽았다. 기사 전문 첫페이지에 풍선 모양의 자막을 통해 이것(아이폰)에 대해 들어나 보았나?” 라는 다소 익살맞은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아직 아이폰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테크놀러지 발전에 무딘 사람 아니면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장난기가 넘치는 짓궂은 질문인 것이다. 더 장면이 다음에 펼쳐진다. 한 젊은 여성이 아이폰을 들고 전화하는 그 옆으로 한 남성이 전화기와 컴퓨터, 메일박스, 지도, TV 등등을 잔뜩 담은 쇼핑 카트를 끙끙 거리며 밀고 가면서 전화기로 전화를 하는 우스꽝스런 장면이 펼쳐진다. 눈치 빠른 사람은 작고 가벼운 아이폰에 그 남자가 힘겹게 밀고 가는 모든 물건들의 기능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것이다. 기술적으로 작게 만들 뿐 아니라 이렇게 다양한 기능을 하나의 기계에 모아 놓는 것을 그런 기술적인 경향을 디바이스 컨버전스’(Device Convergence: 기계융합, 이하 컨버전스)이라고 한다. 다양한 기능을 작은 기기에서 누릴 수 있도록 한 컨버전스의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다른 많은 전자제품들로 너도 나도 컨버전스 추세를 따라 가고 있는 실정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해본다.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11 8일 자)의 컬럼리스트인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The Lexus and the Olive)의 저자이기도 한 토마스 프리드먼(Thomas L. Friedman)은 그의 컬럼에서 우리에게 신조어 하나를 소개해준다. 바로 ‘E2K’라는 단어이다. (아래 사진 프리드먼)



이 단어는2000년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컴퓨터의 시간 적 오류 때문에 재앙을 가지고 올지 모른다는 소위 ‘Y2K’라는 단어를 빗대어 만든 새로운 단어이다. 우리에게’Y2K’라는 단어는 이미 옛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2000년 이전만 하더라도 공포의 단어였다, 왜냐하면 초기 버전의 컴퓨터 제작자들이2000년이라는 새천년이 올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는 오직1900년대의 년 수만 인식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일부 올드 버전 컴퓨터가 오작동해서 엄청난 재앙이 올 것이라는 공포를 만들어 낼 정도로 무시무시한 단어였다. 이를 빗대어 만는 ‘E2K’라는 신조어는 이 다음 다가오는 시대를 위해 기업이 반드시 준비해야 될 것이 있는데, 즉 환경 친화적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양산체제를 각 제조업체가 갖추었냐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환경의 이슈가 이제 곧 수면 위로 드러날 텐데 환경친화적 제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사장될지 모른다는 공포이다. 모든 기업에게 있어서 환경’(Eco)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화두되고 말았다.

하이테크놀러지 분야에서 컨버전스(융합)이라는 기술력이 없다면, 즉 다양한 기술 모두를 하나의 디바이스 안에 융합하고 있는 기술적 추세를 기업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 기업은 미래의 시장을 미리 선점할 수 없다. 아니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내주고 어느 새 퇴출 기업에 명단을 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소비자는 이제는 단순히 전화만 잘되는 셀폰을 찾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게임도 되고, 인터넷도 되고, 동영상도 볼 수 있는 것이어야 소비자의 구매력을 자극할 수 있다. 시장은 냉정하다. 한번 퇴출을 맞으면 쉽게 돌아 올 수 없다. 컨버전스는 소비자에게는 희소식일지 몰라도 생산자에게는 정말 어려운 숙제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 즉 기업이 친환경적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도 지금의 트렌드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 기업의 도태를 의미하는 중요한 흐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중국에서 생산된 아이들의 장난감에 납 성분이 검출되어 이미 팔린 모든 제품들을 대량으로 리콜 했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환경의 기준은 더 높아만 지고 환경에 대한 관심은 더 깊어 간다. 이런 시장의 흐름은 기업에게 많은 돈을 투자해서라도 환경친화적 물건을 생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다시 말해, 환경친화적이지 못한 생산품은 이제 시장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미래의 기업은 친환경적인 것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한가지를 먼저 집고 넘어가고 싶다. 그렇다면 인간의 끝없는 기술의 발전과 성장은 우리의 삶의 질을 정말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텔레비전 커머셜을 통해 포장되고 선전 되어 지는 많은 생산품들은 마치 그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우리의 삶의 질이 향상되어지고 더 나아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여 지게 한다. 과연 인간의 삶은 이런 것들을 알고 누릴 때에만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술의 발전에 속도에 발맞추어야 한다는 중압감에 살아 간다. 사실 그것은 단지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심리적인 압박감은 스트레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컴퓨터의 새로운 오퍼레이션 시스템이 개발 될 때마다 우리는 편리하게 이용하라고 만들어진 그 프로그램을 배우도록 시간과 물질의 소비를 강요 받는다. 편하자고 만든 프로그램이 오히려 배워야만 하는 심리적 압박 기제가 되어 우리를 죄어 온다. 그래서, 가장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것이 인간의 삶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물건의 구매력을 높이기 위한 상술에 지나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는 얽매여 있지 않은가 하는 사실들 말이다.

이러한 삶의 현실들은 우리로 하여금 본질적인 것들보단 비본질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케 한다. 끊임없는 기술발전과 기업환경 변화에 순응하기 위해 기업은 기업 자신을 언제나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위기 속, 개인은 그 기술 발전을 따라 잡지 못한다면 회사나 공동체에서 명퇴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기를 돌아보고 나아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 다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잃은 지 벌써 오래다. 경영학 서적, 창업서적, 재테크 서적 등등을 뒤적거릴 시간적 여유가 있어도 우리의 존재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볼 시간적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삶의 분주함에 치여서 우리는 정작 알아야 할 중요한 문제들을 도외시 한다. 그 본질적인 물음 중에 하나가 바로 종교라는 물음이다.

 요즘 세태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마치 종교가 낡은 문화 인양 폄하하는 사람들의 경향들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많이 목격한다. 물론 종교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차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그것을 뛰어 넘어 아예 종교에 대한 사회적 이지메가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들게 만든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것들을 발견하면 그것이 종교의 전체 모습 것처럼 침소봉대한다. 그리고는, 사회 전체가 나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사회적 분위기에 메몰 되어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런 것일까?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종교가 이 시대에 맞지 않다고 다그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우리에게 버겁고 또한 낡은 패러다임처럼 보여 진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시간적 여유도 없는데 남을 돌아 보라니 현대에는 맞지 않는 말처럼 들려진다. 경쟁이라는 단어가 더 친숙한 이 시대에 있어서 남을 배려하라는 말은 마치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잊혀진 노래쯤으로 치부해버린다.  특별히 한국 사회는 종교에 대해, 특별히 기독교에 대해 냉혹할 정도로 가혹하다. 물론, 기존의 한국 교회들이 보여준 낡은 행태들로 인해 비난을 받을 만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필자도 인정하는 바이다. 더욱이 많은 구조적인 모순이 존재하며, 리더들의 보여준 사회적 일탈 또한 많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교회의 전체 모습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고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교회는 받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싸잡아 비난을 받고 있는 형국이다.

 

예를 들어보자, 불과 한두 달 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납치 사건은 한국사회가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단적으로 보여준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동시대의 한국인들의 눈에 비친 선교나 자원봉사는 낡은 패러다임, 낡은 틀인 것처럼 여긴다. 굳이 그것을 위해 외국에 나아야 했느냐고 말한다. 거기에 덧붙여 왜 가지도 말라는 곳에 기독교인들은 공격적인 선교를 위해 나서냐고 짐짓 가르침까지 준다. 한가지 쉬운 질문을 하겠다. 사람을 잡아 죽인 집단의 폭력성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가지 말라는 곳에 가서 잡힌 것 사람이 더 죄인인가? 물론 가지 않았으면 좋았을 곳이라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어떤 사람들에겐 도움을 주기 위해 달려가야만 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변화와 개혁을 위한 깊이 있는 논의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 사회는 마치 마녀사냥을 즐기듯 부정적인 교회의 모습이나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들추어 내는 데에 더 열성적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삶을 주조하며 이끌고 있는 현대사회의 패러다임의 실체는 무엇일까? 위에서도 컨버전스이니 E2K니 하는 것에 대한 관심들이 지극히 경제적인 동인, 요인 때문이다. 좀 노골적으로 말해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대하다.  불행히도 먹는 문제에 더 많이 집중한다. 새로운 기계와 기술에 언제나 열광하고 있지만 그 기술과 기계가 과연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볼 겨를도 없다. 많은 순간 새로운 아이폰이나 윈드우 비스타가 출시되면 그것을 산 사람은 그것들을 꼭 배워야 한다는 중압감을, 그것들을 구입하지 못한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깊은 존재의 불안감 속에 산다. 그것을 구매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존재가 된 것일까? 더 나아가 정말 그것들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무서워해야 할 것들일까? 다시 말해, 그것들이 우리의 삶에 가장 본질적인 부분의 것들일까? 인간의 삶을 공허와 허무 가운데 떨어지게 하여 존재 자체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하는 것들 일까?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하나님을 존재케 근거’, ‘존재케 하는 용기라고 말했다. 그리고, 종교를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이 허무와 공허 가운데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삶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가진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죽음과 삶 사이의 두려움 속에도 존재하기 위한 용기가 필요한데 그 근원이 되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틸리히는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의미 없는 것에서 의미있는 것으로 변화시켜 주는 분이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종교에 대한 어두운 부분은 호기심을 갖지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깊이 있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참된 앎, 참된 지혜는 우리를 돌아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를 존재케 하시는 이인 하나님을 만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